악한 음모를 꾸미는 지도자들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이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흉계로 잡아 죽일 방도를 구하며 이르되 민란이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하지 말자 하더라.” (1-2)
이스라엘 종교력으로 1월 14일 저녁부터 15일 아침까지가 유월절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이집트로부터 해방시키신 그 날을 잊지 않기 위해서 기념일을 만드셨는데, 온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유월절의 그 어린 양처럼, 예수님께서 그 날에 맞춰서 십자가를 지시고 돌아가십니다. 레위기에 따르면 15일부터 7일간 무교절입니다(레23:6). 그런데, 여기 마가복음에 따르면, 무교절의 첫날을 유월절로 명시합니다(12절). 아마 처음에는 유월절과 무교절을 구별해서 8일간 지키다가 유월절과 무교절을 구별하지 않고 7일 간으로 단축되어서 무교절(유월절)로 지켜진 것 같습니다.
원래,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은 유월절은 지나고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시기에 맞춰서 예수님이 돌아가신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악한 무리들이 그렇게 쓰임(?)을 받습니다.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3)
예수님과 제자들이 베다니 마을에 한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보통 나병환자들은 일반 백성들과는 좀 떨어져서 거주합니다. 나병환자들이 무리지어서 거주하던 동네가 ‘베다니’였다고 많은 학자들은 주장합니다. 이 구절이 그 주장을 뒷받침하는데, ‘베다니’란 지명의 뜻이 ‘가난한 자의 집’이란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나병환자 뿐만 아니라 창기들이나 장애인들이나 찢어지게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살았을 것입니다. 이런 곳에 예수님이 대접을 받는데, 변변찮은 식사겠지요. 그 때 이름은 밝히지 않았지만, 요한복음에 따르면 ‘마리아’라고 나옵니다. 아마 나사로의 여동생일 것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평생 모든 돈으로 산 향유를 예수님께 붓습니다.
보통 처녀가 이런 향유를 가지고 있는 것은 당시 문화적으로 신랑에게 첫날 밤에 사용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 마리아는 자신의 결혼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자기 마음 속에 신랑으로 모셨다는 의미지요. 그런데, 예수님을 사랑하지만, 감히 예수님께 자기의 남편이 되어 달라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제 곧 예수님은 영문 밖에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셔야 되기 때문이지요.
“어떤 사람들이 화를 내어 서로 말하되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는가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4-5)
이 여인의 갑작스러운 섬김을 못 마땅히 여겨서 책망한 사람이 나타납니다. 요한복음에는 ‘가룟 유다’가 나오는데, 마가복음에는 한 두 사람이 아닌 것 같습니다. 아마도 유다가 선봉에 서고, 제자들이 합세했겠지요. 그 향유를 비싼 값에 팔면, 예수님의 정치자금(?)으로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것을 잠깐 좋은 향기를 피우고 사라지게 했다는 분노를 표출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6-9)
예수님은 오히려 제자들을 책망하시고, 마리아의 행동을 칭찬하십니다. 사실, 가룟 유다의 속셈은 따로 있었지요. 그 돈을 횡령하여 자기가 쓰려던 것입니다. 마리아의 섬김은 정말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드린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라고 말씀하십니다. 마리아는 몰랐겠지만, 예수님이 곧 죽으시는데, 그 죽음에 대해서 12 제자들은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이 잡히시자, 도망가고 숨기에 바빴지요.
유다의 배반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가 예수를 넘겨 주려고 대제사장들에게 가매, 그들이 듣고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약속하니 유다가 예수를 어떻게 넘겨 줄까 하고 그 기회를 찾더라.” (10-11)
요한복음에 보면, 사탄이 가룟 유다에게 예수님을 팔 생각을 넣어 주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수년 동안이나 따라 다녔지요. 예수님께서 12둘 중에 유다에게 재정을 맡겼는데, 이렇게 쉽게 예수님을 배반하다니 참 안타깝습니다. 우리들도 사탄의 꾀임에 넘어가지 않도록 말씀과 기도로 무장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빼앗기지 않도록 주님 우리를 붙들어 주옵소서! )
“무교절의 첫날 곧 유월절 양 잡는 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여짜오되 우리가 어디로 가서 선생님께서 유월절 음식을 잡수시게 준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하매 예수께서 제자 중의 둘을 보내시며 이르시되 성내로 들어가라 그리하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리니 그를 따라가서 어디든지 그가 들어가는 그 집 주인에게 이르되 선생님의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을 먹을 나의 객실이 어디 있느냐 하시더라 하라. 그리하면 자리를 펴고 준비한 큰 다락방을 보이리니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준비하라 하시니 제자들이 나가 성내로 들어가서 예수께서 하시던 말씀대로 만나 유월절 음식을 준비하니라.” (12-16)
성경에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신학자들에 따르면 엣세네파의 사람들이 일부 예루살렘 성 안에 살았습니다. 당시 사회는 여성이 물동이를 지고 물을 길어 저장하는데, 여기에 한 남성이 등장해서 물동이를 지고 갑니다. 당시 엣세네파는 사람들은 금욕적이고 거의 결혼을 하지 않고 메시야를 기다리면서 경건하게 살았다고 합니다. 일부는 광야로 나가서 공동체 생활을 하지만 일부는 예루살렘 성 안에 거주했습니다. 그리고 그 예루살렘 성 안에 있는 엣세네파 형제들이 광야에서 살다가 이스라엘 절기를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오는 형제들을 위해 객실을 준비하고 잠시 머물면서 절기를 지킬 수 있게 섬겼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를 보내시며, 물동이를 나르는 남자를 쫓아가서 예수님과 함께 유월절을 지키겠다고 하면, 객실을 마련해 줄 것이란 말씀을 하신 것이지요.
“저물매 그 열둘을 데리시고 가서 다 앉아 먹을 때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 하신대 그들이 근심하며 하나씩 하나씩 나는 아니지요 하고 말하기 시작하니 그들에게 이르시되 열둘 중의 하나 곧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니라.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자기에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하시니라.” (17-21)
예수님께서 여러 번 유다를 향해서 말씀하셨지만, 유다는 시치미를 떼고 계속 예수님을 팔 생각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유다에게 돌이킬 기회를 주신 것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마지막 만찬 (성만찬)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니 다 이를 마시매 이르시되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이에 그들이 찬미하고 감람 산으로 가니라.” (22-26)
누가복음에는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만찬을 드시면서, 이 유월절 저녁에 행하시는 이 식사의 사건을 기념하라고 하셨습니다(눅 22:19). 그래서 오늘날 교회들이 이 유월절 마지막 만찬을 ‘성만찬’이라 이름짓고 ‘성찬식’이란 예식을 만들어서 행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고백하는 성도는 세례(또는 입교)를 받고, 이 예식에 참여합니다.
이 성찬에 참여한 성도는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에 달리셔야 했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성찬에 참여했다는 것은 예수님처럼 우리들도 피흘리기까지 죄와 싸워야 함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각자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하고 때로는 그 십자가 때문에 죽게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목숨을 걸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일반 사람들과는 다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예수님의 12제자들은 그 의미를 잘 모르고 이 성만찬에 참여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이 다음 사건을 통해서 드러나지요.
제자들이 예수님을 부인하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이는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하였음이니라.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베드로가 여짜오되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리하지 않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베드로가 힘있게 말하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 (27-31)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다 자기를 부인(否認)할 것이라고 했을 때, 베드로도 그렇고 모든 제자들이 그렇지 않겠다고 하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다시 제자들의 대표격인 베드로가 3번이나 예수님을 부인(否認)할 것을 예언하십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이 자기를 부인하지 않기를 원하시지만, 이것을 시작으로 영원히 예수님을 떠나지 않게 기도하십니다.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 앉으셔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믿음에 설 수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기도’하는 일에 처절한 실패를 맛봅니다. 우리들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믿음과 신뢰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고 하면, 기도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들도 연약하여 기도하는 일에 실패합니다. 기도를 우습게 여기고, 내 앞에 닥친 현실적인 일을 해결하는데 모든 에너지와 힘을 쓰지요.
“그들이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새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 조금 나아가사 땅에 엎드리어 될 수 있는 대로 이 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여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32-36)
예수님은 기도를 통해서 아버지의 뜻을 이루십니다. 예수님도 인간적으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것을 싫어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고는 제자들을 구원할 수 없기에, 온 인류를 구원하실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을 희생하여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십니다.
“돌아오사 제자들이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다시 나아가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시고 다시 오사 보신즉 그들이 자니 이는 그들의 눈이 심히 피곤함이라 그들이 예수께 무엇으로 대답할 줄을 알지 못하더라. 세 번째 오사 그들에게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 되었다 때가 왔도다 보라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37-42)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이 겟세마네라 하는 동산에서만 3번 기도하셨습니다. 그 3번 동안 제자들은 한 번도 제대로 기도하지 않았지요. 그런데도 예수님은 제자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을 위해 기도해 주십니다. 기도 후에는 담담히 십자가의 죽음 앞으로 걸어가십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곧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무리가 검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예수를 파는 자가 이미 그들과 군호를 짜 이르되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아 단단히 끌어 가라 하였는지라. 이에 와서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하고 입을 맞추니, 그들이 예수께 손을 대어 잡거늘 곁에 서 있는 자 중의 한 사람이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라.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으면서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는 성경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43-50)
예수님의 말씀대로 가룟 유다는 악의 무리들을 이끌고 예수님을 잡으러 선봉에 섰고, 예수님의 나머지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합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11 제자들이 피할 수 있도록 부탁하신 장면이 나옵니다. 끝까지 제자들을 사랑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말씀을 전하실 때는 사람들의 눈치를 보고 잡지 않다가, 유다의 배신을 이용하여 악한 계획을 이루지요. 예나 지금이나 악의 무리들은 비겁하고 간사한 짓으로 자신들의 계략을 이루어 갑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주님께서 다 아십니다.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가다가 무리에게 잡히매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니라.” (51-52)
여기에 등장하는 한 청년은 아마도 ‘마가’가 아닌 가 판단이 됩니다.
공회 앞에 서신 예수님
“그들이 예수를 끌고 대제사장에게로 가니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다 모이더라. 베드로가 예수를 멀찍이 따라 대제사장의 집 뜰 안까지 들어가서 아랫사람들과 함께 앉아 불을 쬐더라.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증거를 찾되 얻지 못하니, 이는 예수를 쳐서 거짓 증언 하는 자가 많으나 그 증언이 서로 일치하지 못함이라.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예수를 쳐서 거짓 증언 하여 이르되, 우리가 그의 말을 들으니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내가 헐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사흘 동안에 지으리라 하더라 하되 그 증언도 서로 일치하지 않더라.” (53-59)
예수님께서 불법적으로 잡혀서, 불법적인 재판을 받습니다. 한 낮에 공회 앞에 서신 것이 아니라, 한 밤 중에 잡혀서 대제사장 집에서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참 어이가 없는 일이지요. 그리고 죄목은 ‘신성모독’입니다. ‘성전을 헐면 사흘만에 다시 세우겠다’는 예수님의 말씀 때문에 성전을 모독했다는 혐의로 감금되고 채찍에 맞고, 구속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성전’은 예수님의 몸을 가리켜서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지만, 정말 3일만에 다시 살아나게 됩니다.
“대제사장이 가운데 일어서서 예수에게 물어 이르되 너는 아무 대답도 없느냐 이 사람들이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냐 하되, 침묵하고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거늘 대제사장이 다시 물어 이르되 네가 찬송 받을 이의 아들 그리스도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우리가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그 신성 모독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도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니 그들이 다 예수를 사형에 해당한 자로 정죄하고 어떤 사람은 그에게 침을 뱉으며 그의 얼굴을 가리고 주먹으로 치며 이르되 선지자 노릇을 하라 하고 하인들은 손바닥으로 치더라.” (60-65)
성전모독죄 가지고는 예수님을 죽이기에 좀 죄가 약하고 판단했는지, 대제사장이 예수님 자신에 대해서 정체를 밝히라고 하지요. 대제사장이나 다른 서기관들, 장로들은 예수님을 그저 선지자 정도로만 생각을 하고,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라는 말이 들리는데, 정말 그런지 묻습니다. 만약 그렇다라고 하면 그 죄목으로 로마 총독에게는 ‘반란 수괴’로 정치적으로 엮어서 죽게 만들려고 계획하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진짜 ‘그리스도’십니다. 물론, 저들이 생각했던 다윗과 같이 정치적인 왕으로서 이스라엘의 독립을 이루려고 오신 분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함께 온 우주를 창조하신 창조주십니다. 그리고 보이는 물질세계 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의 세계까지 온 만물을 다스리실 왕이시지요. 단지 사람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마치 거지 옷을 입은 ‘왕자’처럼 말이지요.
베드로의 부인
“베드로는 아랫뜰에 있더니 대제사장의 여종 하나가 와서, 베드로가 불 쬐고 있는 것을 보고 주목하여 이르되 너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네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겠노라 하며 앞뜰로 나갈새 여종이 그를 보고 곁에 서 있는 자들에게 다시 이르되 이 사람은 그 도당이라 하되, 또 부인하더라 조금 후에 곁에 서 있는 사람들이 다시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 도당이니라. 그러나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가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닭이 곧 두 번째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 곧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기억되어 그 일을 생각하고 울었더라.” (66-72)
예수님의 말씀은 항상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베드로의 부인은 사실, 온 백성과 온 인류의 응답이었지요. 그럼에도 다시 기회를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그 주님을 깊이 묵상하며, 다시 오실 주님을 제대로 맞이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죄와 허물을 용서해 주심을 진심으로 감사하고 사랑으로 섬겼던 베다니 마리아의 헌신과 섬김을 우리는 따르길 원합니다. 우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 주신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깊이 새기며 살게 하시고, 이 세상에 살면서, 언제나 주님을 증거하며, 담대히 살아가게 하옵소서!
주님! 우리의 죄와 욕심으로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도우시고, 악한 생각과 허탄한 생각은 사라지게 도와주옵소서! 베드로의 실패를 교훈삼아, 항상 깨어 기도할 수 있게 하시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말씀에 순종하며,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심을 따르게 하옵소서! 부활하신 승리의 주님을 생각하며, 우리도 승리하게 하옵소서! 감사하며 가장 귀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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