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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기도회

[마가복음] 15장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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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94회 작성일 2025-04-16 19:3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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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빌라도의 심문 

 

 “새벽에 대제사장들이 즉시 장로들과 서기관들 곧 온 공회와 더불어 의논하고 예수를 결박하여 끌고 가서 빌라도에게 넘겨 주니” (1)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고 빌라도에게 허락을 받고자 데려갑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에 대해서 어느 정도 조사를 했고 이미 알고 있다는 학설도 있습니다. ‘빌라도 보고서’란 것이 있다는데, 정말 빌라도가 기록했는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근거가 있는 이야기입니다. 

/* 홈페이지(metabible.or.kr)-교회학교-성경공부 게시판에 빌라도 보고서라는 글을 게시했으니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

 

 “빌라도가 묻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 말이 옳도다 하시매” (2)

 

 빌라도의 심문에서 첫 번째 질문이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인지 묻는 것입니다.  그런 질문을 왜 하는 것이냐 하면, 로마를 대항해 반란의 수괴인지 묻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순순히 ‘그렇다’라고 대답을 합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예수를 잡아서 반역자, 반란 수괴로 끌고 왔는데, 심문해 보니 그렇다고 대답을 하면 더 이상 물을 것도 없이 사형언도를 하면 깨끗이 끝나는 일이 아닙니까? 그런데, 빌라도는 더 예수님께 질문을 이어갑니다. 

 

 “대제사장들이 여러 가지로 고발하는지라. 빌라도가 또 물어 이르되 아무 대답도 없느냐 그들이 얼마나 많은 것으로 너를 고발하는가 보라 하되, 예수께서 다시 아무 말씀으로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빌라도가 놀랍게 여기더라.” (3-5)

 

 대제사장을 비롯해서 여러 가지 죄목들을 빌라도 앞에서 고발하고 있는데, 이것들에 대해서 예수님이 해명을 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습니다. 한 마디로 가당(可當)치도 않은 말이라는 것이지요. 

 

 “명절이 되면 백성들이 요구하는 대로 죄수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더니, 민란을 꾸미고 그 민란중에 살인하고 체포된 자 중에 바라바라 하는 자가 있는지라. 무리가 나아가서 전례대로 하여 주기를 요구한대” (6-8)

 

 여기서 갑자기 유월절 특사(특별사면)를 요구하는 무리들이 나타납니다. 마태복음에는 빌라도가 먼저 ‘바라바’라는 살인자보다 예수님을 유월절을 맞아 풀어주는 한 사람의 죄인으로 선정하려고 의견을 내놓습니다.

 

 “빌라도가 대답하여 이르되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하니,  이는 그가 대제사장들이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러라.” (9-10)

 

 그렇지만, 대제사장과 다른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많은 대중을 움직여서(여론 몰이를 해서) 예수님 대신에 바라바를 놓아 달라고 외치게 합니다.

 

 “그러나 대제사장들이 무리를 충동하여 도리어 바라바를 놓아 달라 하게 하니” (11)

 

 빌라도는 자신의 정치적 권위와 로마 황제 사이의 신임을 계속 유지하려면, 유대 총독으로서 아무런 잡음없이 잘 통치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했습니다. 빌라도는 유대 정치세력과 적당히 타협을 하지요. 그래서 어떻게 예수님을 처리했으면 좋은 지 묻습니다. 

 

 “빌라도가 또 대답하여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이를 내가 어떻게 하랴” (12)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과 대제사장들의 본심을 자신들이 심어놓은 사람들에게 외치게 하지요. 

 

 “그들이 다시 소리 지르되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13)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자신들을 비판하고 권위에 흠집을 내는 ‘예수’ 같은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아서 본보기를 보이려고 하지요. 그렇게 하면, 영원히 자신들의 가문이 대대손손 권력을 누리며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한편, 빌라도가 생각할 때, 이들의 뜻대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에 의해서 또 다른 민중봉기가 일어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찾아왔을 것입니다. 그래서 적당히 예수님을 손(?)을 봐서 양쪽 모두에게 큰 반발을 받지 않도록 협상을 하려고 하지요. ‘죽일 죄까지는 아닌 것 같다’ 는 뉘앙스로 말을 합니다. 

 

 “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하니 더욱 소리 지르되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14-15)

 

 그러나 빌라도는 대제사장 편의 손을 들어줍니다. 빌라도도 그들의 요구에 굴복할 만큼 베짱이 없고, 사리판단이 흐려 있는 것이지요. 지도자는 사람들의 다수의 생각을 따라가면 안 됩니다. 거의 대중은 사리분별이 옳지 못합니다. 민주주의가 항상 옳다고 믿는 경향이 있는데, 이렇게 쉽게 선동당하고, 조종을 받는 것이 군중심리입니다. 옳은 것은 옳은 것이고 잘못된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대쪽같이 말하고 비판할 수 있어야 하고 남들이 다 다수를 따라서 행동하더라도 지도자는 선을 분별할 줄 알아서 올바른 길로 사람들을 인도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지도자입니다. 그런 면에서 빌라도는 자격미달이고, 오고 오는 세대와 교회 앞에 영원한 죄인이 되었습니다. 

 

  • 희롱당하시는 예수

 

 “군인들이 예수를 끌고 브라이도리온이라는 뜰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모으고” (16)

 

 ‘브라이도리온’은 라틴어로 장군의 천막이란 말인데, 빌라도의 관정을 뜻합니다. 이곳에 로마 군인들이 모여서 예수님을 희롱하기 시작합니다. 로마 군인들이 유대인의 왕, 예수님을 욕보이는 것이지요. 

 

 “예수에게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관을 엮어 씌우고 경례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고 갈대로 그의 머리를 치며 침을 뱉으며 꿇어 절하더라.” (17-19)

 

 예수님께서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들의 이런 모욕과 수치를 참으신 것은 자기를 죽이려는 로마인들까지도 것입니다. 예수님의 인내와 용서가 얼마나 큰 지, 아무것도 모르고 단지 외모만 보고 예수님을 우습게 여겼던 이들은 죽어서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얼마나 충격을 받을까요? 예수님은 지극히 보잘것 없는 형제에게 한 행위가 곧 내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25:40). 그렇다면 우리들은 우리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어떤 식으로 대우하고 있습니까? 그들에게서 예수님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 십자가에 달리심

 

 “희롱을 다 한 후 자색 옷을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히고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부터 와서 지나가는데 그들이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예수를 끌고 골고다라 하는 곳(번역하면 해골의 곳)에 이르러” (20-21)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사형장으로 이동하십니다. 잠도 못 주무시고 여기 저기 끌려 다니면서 매맏으시고 심문을 당하시니, 기력이 다했습니다. 도저히 무거운 십자가 형틀을 못 지고 가니, 구레네 사람 시몬을 로마 병정이 잡아서 대신 운반하게 합니다. 이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 시몬이 이 일 후로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그리고 그 아내와 자녀들이 예수님을 믿어서 바울 사도를 돕고 협력하는 일을 하게 됩니다. 억지로 지게 된 십자가가 시몬의 가정을 구원하였습니다. 놀라운 은혜이지요. 

 

 “몰약을 탄 포도주를 주었으나 예수께서 받지 아니하시니라.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옷을 나눌새 누가 어느 것을 가질까 하여 제비를 뽑더라. 때가 제삼시가 되어 십자가에 못 박으니라.” (23-25)

 

 로마 병정들은 십자가에 달리기 전에도 몰약을 탄 포도주를 예수님께 드렸지만, 예수님께서 거부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는 고통을 몸소 당하셨습니다. 그 포도주는 일종의 마취 효과가 있어서 사형수가 비교적 덜 고통스럽게 죽도록 하는 마지막 배려인데, 그것마다 거부하신 것은 모든 인류의 고통과 아픔을 친히 담당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위에 있는 죄패에 유대인의 왕이라 썼고, 강도 둘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으니 하나는 그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26-27)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에 혼자만 달리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강도 두 사람이 예수님 좌우에 하나씩 십자가에 달려서 함께 죽어갔지요. 예수님은 죄없이 돌아가셨고, 좌우의 두 사람은 강도요, 살인자들입니다. 누가복음에 따르면, 한 사람은 예수님을 비방하고 욕했지만, 반대편 한 사람은 자기 동류를 꾸짖고 예수님께 자기를 좀 생각해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낙원에 이르렀고, 한 사람은 음부에 떨어지게 되지요. 

 

 이 상징적인 묘사에 예수님이 기준이 되십니다. 모든 죄인을 위해 예수님께서 죽으셨지만, 예수님의 은혜를 입을 사람은 자신의 죄를 시인하고, 예수님을 높이고 예수님께 자기 영혼을 부탁한 사람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을 비방하고 자신을 위해서 이용해 들려고 한 사람, 예수님을 자신과 같이 죄인이요 악당취급한 그 사람은 심판을 받고 멸망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어느 편에 서야 합니까?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이르되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다는 자여,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고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함께 희롱하며 서로 말하되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가 보고 믿게 할지어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도 예수를 욕하더라.” (29-32)

 

 그런데, 사실 좌우에 있던 강도들 모두 처음에는 예수님에 대해서 욕했던 사람이었다는 것이지요.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서 한 사람은 그 짧은 시간 동안 예수님께 용서를 구하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모든 사람들은 다 죄인이 맞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앞에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한 자, 오른편 강도만이 그런 사람의 대표적인 모습인 것입니다. 누구나 처음에는 예수님에 대해서 오해하고, 잘못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길이 참으시고 기다려 주시는 예수님 때문에 그러한 우리들이, 죄인이 돌이킬 수 있는 것입니다. 

 

  • 예수님의 죽으심과 한 백부장의 증언

 

 제육시가 되매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더니, 제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33-34)

 

 우리 시각으로 12시부터 오후 3시까지 온 땅에 어둠이 임했습니다. 이런 일이 팔레스타인 땅에서는 거의 없는 일인데, 하나님의 슬픔을 드러내는 듯합니다. 어쩌면, 예수님의 죽으심을 차마 하늘에서 볼 수 없어서 구름으로 가리는 것 같습니다. 철저하게 예수님의 고통의 외침을 외면하시는 것은 우리들의 구원을 위해서 철저하게 예수님을 희생하시는 하나님의 결심(?)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버림받았기 때문에 우리들은 ‘받아들임’(?)이 되었습니다. 

 

“곁에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이르되 보라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한 사람이 달려가서 해면에 신 포도주를 적시어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하고 이르되 가만 두라 엘리야가 와서 그를 내려 주나 보자 하더라.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지시니라.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그렇게 숨지심을 보고 이르되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멀리서 바라보는 여자들도 있었는데 그 중에 막달라 마리아와 또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있었으니, 이들은 예수께서 갈릴리에 계실 때에 따르며 섬기던 자들이요 또 이 외에 예수와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온 여자들도 많이 있었더라.”  (35-41)

 

 예수님의 죽으심과 동시에 성전의 휘장이 갈라지기 전에는 대제사장만이 1년에 대속죄일에 1번만 들어가서 죄인들을 위해 중보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휘장이 찢어졌기 때문에 누구나 하나님 아버지 앞에 나와 간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히 10:19-20). 

 

 예수님의 죽음과 동시에 주변 환경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서, 수많은 죄인들을 십자가에 처형을 시키며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들을 보았던 로마 백부장은 예수님을 참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고 고백합니다.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 예수님의 장례절차

 

 “이 날은 준비일 곧 안식일 전날이므로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 사람은 존경 받는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42-43)

 

 안식일은 토요일인데, 전날이라고 했으니까 예수님은 우리 식으로 ‘금요일’에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들은 고난주간의 금요일을 ‘성금요일’로 기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장례를 위해서 이제까지 드러내어 놓고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던 산헤드린 공의원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의 시체를 빌라도에게 요구합니다. 보통은 하루 정도 시신을 십자가에 달린 채로 내버려두는데, 요셉이 예수님 곁에서 숨이 끊어지자 바로 장례를 치르게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 곁을 떠나 숨었는데, 숨어있던 예수님의 제자 아리마대 요셉은 이제 공개적으로 예수님의 시신을 수습합니다. 

 

 요셉이 이렇게 행동하는 것은 자신의 모든 기득권을 빼앗길 수 있는 엄청난 용기를 낸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비겁한 자를 담대하게 용기있게 만듭니다. 예수님의 순교를 통해 성도들은 주님을 죽기까지 따를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 성도들의 순교를 통해서 선교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빌라도는 예수께서 벌써 죽었을까 하고 이상히 여겨 백부장을 불러 죽은 지가 오래냐 묻고, 백부장에게 알아 본 후에 요셉에게 시체를 내주는지라.” (44-45) 

 

 다른 죄수들은 더 오래 버텼지만, 예수님은 육체적으로 많이 쇠약해 진 상태에서 십자가에 달리셨기에 나무에 달리신 지, 6시간 만에 운명하십니다. 빌라도는 요셉에게 시신을 내어 줍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옛날 선지자의 언약대로 부자의 무덤에 들어가시게 됩니다. 

 

 “요셉이 세마포를 사서 예수를 내려다가 그것으로 싸서 바위 속에 판 무덤에 넣어 두고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으매, 막달라 마리아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 둔 곳을 보더라.” (46-47)

 

  (기도) 하나님 아버지! 고난주간에 예수님의 십자가에 달리신 말씀을 상고해 봅니다.

 유대인들만을 위해 죽으신 것이 아니라 모든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 달리심을 믿습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예수님을 조롱하고 십자가에 못 박는 어리석은 로마 군인들, 그리고 죽을 죄를 지어서 함께 십자가에 달린 강도들에게까지 참으시고 저들을 위해 기도하신 주님의 사랑과 은혜에 감격합니다. 

 

 우리가 지금은 예수님을 직접적으로 섬길 수 없지만, 지극히 보잘 것 없는 한 영혼을 예수님과 같이 여기라는 말씀을 따라 우리에게 있는 이웃들과 어린 자녀들과 연로하신 어른들을 사랑으로 섬기게 하시고, 언제나 주님의 관용과 용서함을 본받아 우리도 우리 에게 잘못한 사람들을 용서하게 하옵소서! 

 

 주님! 죄인으로 살다가 비참하게 죽는 그런 인생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신 예수님을 본받아 주님 나라를 위해 우리의 시간과 물질과 에너지를 드리며 헌신하는 거룩한 백성으로 살게 도와 주옵소서! 사순절과 고난주간을 지나며, 점점 주님을 닮기를 소원하고, 성령으로 거듭나기를 원합니다. 성령의 충만함으로 변화시켜 주옵소서! 

 부활하신 승리의 주님을 찬양하며 지극히 높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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