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https://www.christiandaily.co.kr/news/12588>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1)
유대인들은 바벨론 포로기 시기를 지나면서, 자기들을 구원해 줄 ‘메시야’를 기다리는 사상이 생겼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방의 세력으로부터 독립하여 영화로운 다윗의 왕국을 재현할 지 고민을 많이 했지요. 많은 율법학자들이나 경건한 유대인들은 율법으로 돌아가서 그 가르침에 충실하게 살면, 곧 여호와 하나님께서 메시야를 속히 보내 주실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식으로 말하면, ‘경건주의’ 운동이 일어났는데, 철저한 율법적인 삶을 구현하는 방식이 여러 갈래로 나왔습니다. 대푲거인 것이 바리새파이지요.
다른 분파로는 성경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엣세네파’가 있습니다. 아마 세례 요한이 그 분파일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들은 세속에서 벗어나서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려고 결혼조차도 포기하는 금욕주의적인 모습으로 살아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도시나 성읍이 아닌 광야 외딴 곳에 자기들만의 고립적인 생활을 향유했습니다. 물론 일부는 절기를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 안에 일부의 거처를 마련해서, 같은 일파들에게 숙식을 제공하기도 했습니다.
세례 요한을 따르는 사람들이 큰 무리를 이루었고, 이들의 제자들도 상당수 있었습니다. 이들 가운데 몇 명이 예수님께로 넘어오기도 했지요. 아무튼 이 요한이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준 것 같은데, 아쉽게도 요한의 기도가 우리에게 전해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상당 부분,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에 포함이 되어 있을 것 같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이지요. 줄여서 ‘주기도’ 또는 ‘주기도문’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필수적으로 암기하는 것이 3가지 정도인데, 사도신경, 십계명과 더불어 ‘주기도’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쉽게 지나치는데,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정말 핵심적이고 요약적인 가장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에게 원하시는 기도의 모범이 아닌가 생각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2)
기도의 대상은 명확하게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어떤 분들은 명확히 아버지를 부르거나 찾지 않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높입니다.’ 하는 식으로 기도를 올리기도 하는데, 기도의 습관을 좀 고칠 필요가 있습니다. ‘아버지여~’ 하면서, 하나님을 부르는 것은 ‘시선의 고정’입니다. 얼굴 똑바로 보고 이야기하는 것과 전혀 시선을 맞추지 않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주저리주저리 하는 것은 집중력에서 떨어질 수 있습니다.
여기 ‘이름’은 명확히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성호’라고 하지요.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길 원합니다.’라는 뜻인데, 기도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생각하고 대우하느냐에 따라서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한 관념을 갖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무시하면, 세상에서도 별로 하나님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우리가 목숨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면, 세상도 함부로 하나님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시간을 철저하게 지키는 성도와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그런 사람과 약속을 잡을 때, 어떤 행사를 진행할 때,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는 지에 따라, 주일의 개념이 모호해지고 그저 언제든지 대체될 수 있는 그런 시간, 날로 생각하고 회의나 일을 진행시킬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하는 사람이 이렇게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대로 기도한다는 것은 기도하는 사람이 철저하게 하나님에 대해서 ‘거룩히 구별하고 마땅히 최고의 권위로 인정한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정말 하나님을 거룩하게 여기십니까? 신앙의 연륜이 깊어질수록 점점 더 하나님의 이름 앞에 자랑스러운 하나님의 백성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다음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으로부터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 전에는 사람들이 마귀에게 넘어가서, 욕심과 권력과 돈에 의한 지배를 받고 있는 세상이었는데, 그래서 ‘죄’로 다스려지고, ‘심판’과 ‘처벌’의 세상이었는데, 멸망으로부터 구원, 심판으로부터 해방되는 은혜를 예수님께서 이 땅에 가져왔습니다. 그 증거가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표면적으로는 모든 인간이 죽음으로 끝을 맞이하는 것 같지만, 새로운 생명을 얻어 부활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셔서 증명하셨지요. 예수님의 부활을 보고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이후 담대하게 주님의 복음을 증거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사망과 죽음의 권세에서 더 이상 갇혀 있는 인간이 아닌 해방과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단, 그 부활의 과정 속에는 ‘육신의 죽음’은 거의 필연적으로 따릅니다.
죽음을 겪은 이들은 하나님 나라, 천국에 이릅니다. 성경이 말하는 내세적 하나님 나라는 우리가 죽음 후에 들어가는 나라이고, 또 한 가지 ‘주권과 통치적 개념의 하나님 나라’는 지금 살아있는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최고의 권위로 두고 살아갈 때에 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 하나님 나라는 우리의 순종과 헌신이 필수적입니다. 성도 무리 가운데 이루어진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공동체로 세상의 질서와 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으로 다스려지는 곳입니다.
죽음 이후에 우리가 다 천국에 가겠지만,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기 위한 성도들의 결단과 헌신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기도에는 우리의 자발적인 순종과 헌신을 결단하도록 촉구합니다.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3)
과거에는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탈출했을 때, 하늘에서 만나가 내려 광야를 걸으며 지내면서도 끼니걱정을 할 필요가 없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려 주시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온 지구상에 수많은 땅에 씨를 뿌리고 곡식을 거둘 수 있는 곳이 얼마나 넘쳐납니까? 그런데, 아프리카 같은 곳에는 기아와 굶주림으로 허덕이며 죽어가는 사람들이, 아이들이 넘칩니다.
단지 이 기도는 하나님의 책임으로 농사를 짓지 않아도 우리의 먹을 것을 얻도록 해 달라는 간구로 해석하지 않습니다. 이미 우리 지구촌에는 하나님께서 넘치는 땅과 하늘의 비와 햇빛을 공급해 주십니다. 다만 이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누구는 넘치도록 누리며, 어떤 공동체나 나라는 굶주림에 허덕이는 환경에 놓여 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현대 신학자들은 이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 속에서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는데, 그 기아와 굶주림의 책임을 우리가 함께 나눠져야 할 사명임을 지적합니다. 우리의 욕심과 죄와 허물 때문에 우리가 사랑하고 돌봐야 할 이웃을 외면하고 자기 욕심을 채우고 있지는 않는지 살펴야 합니다. 주님의 기도는 하나님만 모든 짐을 지라는 욕심의 간구가 아니라, 넘치게 받은 우리가, 하루 일용할 양식 때문에 근심과 걱정 속에, 혹은 두려움 속에 있는 형제 자매들을 돌봐야 한다는 사명을 깨닫게 합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 하라.” (4)
예수님은 반대편 쪽에 서 있는 성도들, 다시 말하면, 굶주림과 기아 속에서 형제 자매들의 보살핌과 사랑을 받지 못하는 성도들이 가진 형제와 이웃에 대해서 어떠한 태도를 가져야 하는 지도 기도를 통해서 가르쳐 주십니다. 단 한 마디로 요약하면, ‘용서’입니다.
권리와 필요한 양식 등을 빼앗기고, 억압을 받아도 하나님의 백성들은 ‘용서’를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몸소 보여 주셨지요. 십자가 상에서 자신들을 박해하고 욕하고, 심지어 못을 박는 로마 병정에게도 그들의 죄를 묻지 않으시고 하나님께 아버지께 용서를 구하셨습니다.
참, 성도의 길은 주님을 따르는 길입니다. 전혀 쉽지 않습니다. 이성적으로는 주님의 뜻을 알아들어도 감정적으로 ‘복수’하고 싶지요. 그런데, 우리도 조금 힘이 있고, 권력이 있으면 실수하거나 잘못을 저지르기도 합니다. 우리가 어릴 때 억울하게 부모님께 매를 맞기도 하지만, 우리가 부모가 되어서 아이들을 엄하게 과도하게 혼을 내거나 때리지도 않습니까? 우리도 완벽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교만과 허영과 여러 가지 부족한 점을 들어서, 사탄의 유혹이 올 때, 넘어지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예수님을 생각하며, 우리의 억울함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풀어주실 것이라고 믿고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의지적으로 용서하고 관용하며 사랑해야 합니다.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는 마태복음에도 나옵니다. 누가복음보다 긴 내용이 좀더 있지만, 누가복음에서는 이후의 내용은 과감히 삭제했습니다. 아마도 너무 당연하다고 생각되어서 뺀 것 같습니다.
“ …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마 6:13)
예수님은 이후 예를 들어서 이 기도에 담긴 의미를 풀이해 주시는데, 친구 사이에 일어난 에피소드입니다.
“또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꾸어 달라 내 벗이 여행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하면 그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실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5-7)
이 예수님의 비유를 이해하려면, 그 당시 사회적 관습과 문화를 이해해야 합니다. 지금처럼 여관이나 호텔 같은 것이 발달하지 않은 때입니다. 나그네가 있으면, 자기 집으로 초대하여 씻기고 먹을 것을 대접하는 것이 이 유목민들에게는 당연히 해야 할 의무입니다. 서로 연대하여서, 사나운 맹수나 악한 자들에게 목숨을 보호하기 때문입니다.
여기 비유에는 좀더 확장 되어서, 일반 나그네도 대접할 텐데(관습상), 벗이 찾아 왔는데, 외면하고 그냥 돌려 보내겠습니까? 의무로 생각해서 벗이 아니더라도 나그네를 집에 들이고, 식사를 할 수 있게 도와줍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 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 (8)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을 마무리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나그네보다 ‘친구’ 관계를 말했습니다. 그런데, 더 끈끈한 관계로 비유를 하십니다. 그것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입니다.
“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11-13)
예수님은 아주 파격적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어떻게 하늘의 하나님이 ‘내 아버지’입니까? 유대인들도 그렇게 생각을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창조주’는 ‘네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본질적으로 ‘기도’는 관계입니다. 어떤 사회적 의무 관계가 아닙니다. 하나님과 관계 속에서 그 기도가 효력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시겠다고(요1:12). 우리는 주님을 영접하고 주님의 말씀대로 순종하고 따를 때에 어떠한 요구든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우리를 위해 응답해 주시고, 우리의 간구와 소원을 이뤄 주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가 꽤 우리에게 부담으로 다가옵니까?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드리고 우리가 참으로 변화될 때에 우리의 간구하는 모든 것도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응답하실 것입니다. 심지어 우리가 악해도 우리의 아버지께서 우리를 위해 가장 좋은 것으로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그 응답의 결정체는 바로 ‘성령’입니다. 성령을 선물로 받는 참 하나님의 아들 딸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들에게 예수님을 보내 주셔서, 기도하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어찌 우리 같은 이방 사람이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까? 모두 예수님 때문입니다. 아버지! 감사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욕심과 허영으로 기도할 때가 많았습니다. 나의 요구조건만을 늘어 놓는 것을 기도라고 생각할 때가 있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기도를 배웠으니, 우리의 욕심과 교만을 내려놓고, 아버지의 뜻을 구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 나라를 허락하시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심을 감사합니다. 받은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며, 형제와 자매와 이웃에게 주님을 전하며 복음을 전하게 하옵소서! 함께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되고 자녀가 되는 은혜를 내려 주옵소서! 성령의 충만함으로 살아가게 하시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우리 각자의 삶과 우리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